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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목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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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DATE : 2020.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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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아들 삼은 아름다운 사람 

손양원 목사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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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양원 정문에 선 손양원 목사의 모습 (출처: 애양원교회 홈페이지)

 

 

손양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손종일 장로와 김은주 집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08년 7세 되던 해에 부친의 입신과 함께 자신도 입신하고 같은 해에 본당의 한문성당에 입학했다.

이때서부터 그는 부모님을 따라 새벽 기도회도 열심히 참석했으며, 어려서부터 기도와 신앙생활에 힘썼다.

 

손양원목사님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으로, 사랑으로, 죽기까지 하나님께 충성한 순교자요, 사랑의 사도였다.

그는 기도를 호흡으로 삼고, 성경을 양식으로 삼고, 전도가 생활이 되어 사신 분으로 원수에게는 사랑으로,

고난받는 개인과 민족을 향해서는 소망을 던져 주었던 하나님의 종이었다.

또한 그의 설교는 몸으로 하는 설교였으며,그의 삶과 죽음을 통한 설교였다.
  그의 사상에는 항상 민족의 정황이 문제가 되었고, 민족 정신을 복음으로 승화 시켰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며 사는 하나님 중심 사상과 오직 하나님의 은혜 사상, 국가와 민족의 사랑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살았으며,

성경으로 시작해서 성경으로 끝내겠다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 사상, 종말에의 소망 말씀과 삶의 일치 등의 사상을 가지셨다.

다시 말하면 그의 삶 자체가 신구약 성경 66권의 본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국 손목사는 성경대로 하나님만을 섬겼고 나라와 민족과 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알고 살았으며,

가장 소외되고 버림받은 한센병자와 두 아들을 죽인 원수까지 사랑했으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다가 순교하신 한국 교회의 사랑의 화신이요,

한국 교회 일백년 교회사에서 세계 교회에 내 놓을수 있는 자랑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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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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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1년간 부산 지방 선교사 대리로 지방 순회 전도를 하면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펼치던 중 1939년 7월 14일에 여수 애양원 교회로 부임하였다.

손 목사는 신학교 시절부터 신사 참배를 반대해 왔으며 특히 그가 졸업하던 해에 신사 참배가 총회에서 가결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므로 그는 신학교 졸업 후 1년간 부산 지방에서 신사 참배 반대를 외쳤고 이로 인하여 경남 노회에서 순회 강도사 사역을 못하게 되었다.

 

   손 목사는 애양원 교회에 부임해서도 설교 때마다 신사 참배반대를 외쳤으며

손 목사가 가는 곳곳마다 신사 참배에 대한 부당성이 카랑카랑한 검사의 논고와도 같이 지적되었다.

손 목사의 이러한 외침, 어쩌면 와락 터져 나오는 벌떼와도 같이 신앙의 저 깊은 저변에서 용솟음치는 회개를 역설하는 설교로 인하여 가는 곳곳마다

회개의 눈물 바다를 이루는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세월이 오래 계속될 수는 없었다.
1940년 9월 25일, 손 목사는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여수 경찰서에서 나온 형사 두 명에 의해서 연행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나 구속 기간까지 하여 거의 3년의 세월이 흘렀갔다
그 때 손 목사에게 적용된 죄는 신사 참배 거부와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1943년 5월 17일, 만기 출옥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담당 검사는 손 목사를 불러 놓고 사상의 전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담당 검사는 손 목사에게 "덴꼬(轉向)" 해야 나간다는 위협을 하였다.
그러나 손 목사는 그 검사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信仰)가 문제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손 목사는 끝내 그들의 신사 참배의 유혹과 핍박의 손길을 뿌리치고 거부하여 광주 형무소에서 경성 구금소,
청주 구금소로 옮겨 다니면서 해방이 될 때까지 6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는 옥중에서도 기도, 찬송,성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옥중에서도 사랑을 실천하여 옥중 성자로 그 이름이 높았으며
간수들까지도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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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자의 영원한 벗 

 

애양원 교회는 전남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위치한 교회로 한센병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애양원 한센병자 수용소는 미국남장로 교회 선교회의 전도 사업의 일부분으로 1909년 광주 양림에서 시작했으나 1925년, 이 곳으로 이전 확장되었다.

 처음에는 9명으로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1천 명이상을 수용하는 대규모의 한센병자 수용소가 되었다.


손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36세의 젊은 나이로 이 곳에 와서 순교할 때까지 목회를 하셨는데

그는 환우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으며 잠자리도 같이할 만큼,사랑을 말로써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실천하면서 살아간 목자였다.

애양원에 부임한 손 목사의 하루는 한센병자들과 함께 하는 생활 이외에는 없었다.


당시 애양원에 있는 분들 중에는 병에서 완쾌된 상태의 분들도 많았지만 그 동안 심한 병마와 투병 과정에서 눈을 잃어버린 사람,
손이 꼬부라진 사람, 걸음걸이가 부자유한 사람,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형태로 일그러진 분들이 많았다.
그들은 부모 형제가 없는 고아들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세상 어디에서도 그들을 따스한 사랑으로 감싸주면서
인간다운 대접을 해 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이 곳 애양원에서 일생을 보내려는 분들이 많았다.

그 당시 한센병자는 아무도 그들을 사람으로 대접해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가족들에게까지도 철저하게 외면된 삶을 사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손 목사는 그들에게 있어서 신체적인 병을 치료해 주는 의사 못지 않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들이 비록 육체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지만,
그들의 영혼은 찬송과 감사와 기도의 옷을 입혀서 아름다운 성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심이 손 목사에게는 힘이 되어 주었다.

당시 애양원에는 병으로부터 완치된 상태에 있는 분들과 함께 병이 악성으로 진행되고 있는 분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14호실은 애양원 전체에서 가장 상태가 심한 중환자들이 모여 있는 병실이었다.
14호 중환자실에는 같은 환우들도 가기를 꺼리는 곳인데
손 목사는 그 곳에 들어가서 중환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안아 주면서 기도를 해 주었다.

이러한 손 목사를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랑하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교인들이 손 목사님을 너무나 좋아하고 따르니까 그것을 시기해서 손 목사를 지독스럽게 미워하고 헐뜯는 부인이 한명 생겼다.
그 부인은 폐병 환자였는데 손 목사는 새벽 기도를 드린후, 자기를 가장 미워하는 그 부인의 집에 매일 들러서 그의 머리에 안수 기도를 해주었고,

좋은 음식이 생기면 그 집에 가지고 가서 그를 대접했다.
  
이러한 손 목사님의 모습을 교인들이 보고 "목사님을 그렇게도 미워하는데 무엇하러 가느냐?"고 묻자, 손 목사는 "사랑으로 녹여 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손 목사는 그러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녹여 낸 사랑의 목회자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버림받아 의지할 곳 없이 외로이 지내던 한센병자들이 이와 같은 언행이 일치된 사랑이 넘친 신앙 지도를 받으면서 소망으로 살고,

기쁨으로 넘치는 찬송을 부르는 신앙의 소유자들로 변화되게 되었다. 손 목사는 그들의 신앙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그는 8·15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오자 곧장 이 사랑의 보금 자리인 애양원 교회를 다시 찾았고 그리하여 교우들의 신앙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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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한 목자 

 

그가 1946년 3월 경남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더욱더 심혈을 기울여 한센병자들과 생사를 같이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일하고 있을 때 한 커다란 사건이 터졌는데 그것이 바로 여순 사건이 었다.


1948년 10월 19일이었다. 당시 제주 폭동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 여수에 집결했던 군인들 중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남로당 계열의 군인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반란군이 된 것이다.  

이 때에 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각각 순천 사범 학교와 순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신앙과 민족 정신에 불타는 이 두 형제는 학교 안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산주의의 잘못을 폭로하였다.
그리하여 두 형제는 인민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때에 두 형제는 서로 대신하여 죽기를 자원하였다.
그러자 잔인한 폭도들은 형제를 한꺼번에 무자비하게 총살하고 말았다.

 

애양원 성도들은 손 목사의 두 아들의 시신을 거두어 교회 앞에 시신을 안치한 후
애양원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지금의 애양원 동산에 묻히게 되었다.

손 목사의 두 아들이 순교될 때 애양원 교회에서는 이인재전도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고 있을 때였다.
부흥회 도중에 이런 변을 당하게 되자 부흥 강사는 장례식의 주례까지 맡게되 었다.

 

장례식은 간단했으나 이 땅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산 제사를 올리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그 날 손 목사가 장례식 끝 부분에 고백했던 마지막 인사는 또 한번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한 편의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긴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 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 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한센병자 형제 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

 

사랑하는 두 아들을 떠나 보내는 장례식장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쓰린 가슴을 부등켜안고서는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찾아서 아들로 삼겠다는 그 뜨거운 사랑은,
활활 타오르는 예수 사랑의 용광로가 되어서 참석한 사람의 마음은 물론 손 목사를 대하는  모든 분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여수, 순천 반란이 진압된 후 정세는 바뀌었고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손 목사는 재선이를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 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 주었다.

 

양아들로 삼았던 안재선 씨는 성경 학교 졸업 후 잠시 부산의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말년에는 제주도에서 어물 도매 사업을 하다 1979년 12월 서울에서 별세했다.
손 목사님은 실로 주님이 주신 계명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복종하여 실천한 20세기 사랑의 사도요, 성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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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로서의 최후의 영광 


1950년 뜻하지 않는 6·25동란이 이 땅 위에 발발했다.
파죽지세로 38선을 넘어 서울로 쳐들어온 북한군은 한강을 넘어 수원을 점령하고
대전을 빼앗고 대구로 진격하는 한편, 일부는 호남으로 진격하여 호남 일대도 점령하게 되었다.
이 때 교회도 문을 닫고 피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 목사는 피난하지 않고 교회에 남아 계속 교회 종을 치게 했으며, 자신이 강사가 되어 계속하여 교회에서 특별 집회를 했다.
집회의 주요 내용은 '잘 죽자'라는 것이 었다.

 

이 때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손 목사를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자
결국은 교회의 제직들과 교역자들 모두 함께 떠나자고 간청을 하였다.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제직들의 간청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손 목사는 함께 송별 예배를 드리고
배에 올라가 마지막 찬송을 부른 후 갑자기 혼자만 배에서 가방을 들고 뛰어 내려오는 것이다.

 

교인들이 "목사님, 왜 피난을 가지 않고 다시 배에서 내려가시는 겁니까?"라고 묻자,
손 목사는 "나는 원래 피난을 가지 않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죽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내가 피신한다면 일천 명이나 되는 양떼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만일 피신을 한다면 그들을 자살시 키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하며
피신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제직들만 보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손 목사는 마침내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 되어
1950년 9월 28일 저녁11시 여수 근교 미평에서 총살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간직하였다.

 

당시 손 목사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양들을 보호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총의 개머리 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공산군의 총에 순교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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